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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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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시브럴/ 김사인 몸은 하나고 맘은 바쁘고 마음 바쁜데 일은 안되고 일은 안되는데 전화는 와쌓고 땀은 흐르고 배는 고프고 배는 굴풋한데 입 다실 건 마땅찮고 그런데 그런데 테레비에서 <내 남자의 여자>는 재방송하고 그러다보니 깜북 졸았나 한번 감았다 떴는데 날이 저물고 아무것도 못한 채 날..
아들의 방/ 정운희 문은 고통 없이 잠겨 있다 가장자리부터 녹슬어가는 숨결을 품고 있는지 언젠가 제 몸이 녹의 일부가 되기까지 더 많은 악몽을 배설해야 한다 느닷없이 선반 위 유리컵이 떨어지듯이 느닷없이 손목을 긋고 욕조에 몸을 담그듯이 그곳에서 분노와 상처를 해결하고 녹을 꽃처럼 피워내 안..
하필 그때 왜?/ 김수열 오랜만에 찾은 관음사 미륵불 앞에서 두 손 모으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는데 '우리 아이들 아프지 않게 허여줍서' 그런대로 여기까진 괜찮았는데 하필, 그때, 왜? '관세음보살'은 어디 가고 '아멘'이 튀어나왔는지······. 괜한 짓을 한 탓일까 절 문까지 나오는데 두 번 넘어질 뻔했다 ..
무모증/ 김이듬 옛날 사람이 찾아와 호수에 가자고 한다 호수그릴 오피스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고 하며 빼고 다시 넣으세요 거긴 옆 건물이라서 주차비를 내야 할걸요 천장이 높구나 공중묘기라도 부릴 거니? 그래, 각선미는 여전하군 내겐 무모한 팔다리가 있다 이제 겨드랑이 털은 나지 않는다 바람 ..
제사 뒷날 / 박상률 아버지 기일을 맞아 진도 고향 집에서 자고 있는 새벽 쩌렁쩌렁 울리는 마을 확성기가 새벽잠을 깨운다 다를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이장이 아침 문안드립니다 요즘 좀도둑이 성헌께 낮에 들에 가실 적엔 사립 문단속 잘 허시기 바랍니다 사촌 줄 것은 읍서도 도둑맞을 것은 있다 안 헙니..
정액 캡슐/ 김기택 끈적끈적한 분비물이 아니라 천사의 영혼으로 임신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욕망 없는 순결한 몸으로 낳은 깨끗한 성처녀의 몸에서 나온 명품 아기를 갖고 싶지 않으십니까? 순수한 몸과 고귀한 영혼을 가진 당신을 위해 드디어 탄생했습니다. 먹는 임신약, 정액 캡슐! 침대 위에서 거쳐야 ..
호두/ 장옥관 너는 너의 호두를 쥐어본 적이 있다 주름이 많고 온기가 있고 굴리면 명랑한 소리가 나는 호두 두 알 불꽃을 간직한 호두 호두껍질 속의 우주, 스티븐 호킹이 루게릭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게 1963년이었다 너는 호두 때문에 울어본 적이 있을까 하지만 호두는 결단코 슬픔과는 거..
바람의 후예/김나영 1 아버지는 늘 바람을 부리고 사셨다 늦게 귀가하는 아버지 몸에서 양지바람꽃 냄새가 났다 대문 밖에서 바람의 지문을 다 털고 들어와도 ] 아버지는 바람의 꼬리를 들켰다, 들켜도 잘라내도 도마뱀꼬리처럼 다시 자라나던 바람의 질긴 꼬리가 기어이 엄마를 수덕사로 가게 만들었다 바람..